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미스테리

그것이 알고싶다, 광화문 촛불 시위 '효순이 미선이 사건'으로 시작

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한반도가 뜨겁게 달궈졌던 2002년.. 16강 진출을 눈앞에 두고있던 조별리그 3차전 '포르투갈'과의 경기가 있던 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. 


경기도 양주 광적면 시골길에서 친구 생일파티에 가기위해 집을 나섰던 여중생 두명이 (신효순,심미선)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사를 당한 것이었다.


이 소식을 듣게된 국민들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.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두 학생을 살해한 가해자 운전병과 관제병이 '무죄'를 선고받은 것이다.


광화문 촛불의 역사

 

무죄판결의 이유는 운전병이 두 소녀를 보지 못했고, 관제병은 앞에 사람이 있으니 피하라고 운전병에게 전달했다고 한다. 하지만 통신 장애가 있어서 전달이 안됐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것.. 때문에 무죄..


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분노했고 하나 둘씩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.

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 군중이 광장에 나오게 된 것이다. 한마음으로 뭉쳐 거리로 나오게 만든 것은 월드컵의 효과도 한몫 했다는 견해가 있기도 함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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당시 미2사단 군인들도 촛불을 들고 여중생을 추모하기도 했다.


<효순이와 미선이를 압사시킨 M-60 AVLM 전차>


과거 반미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 처참하게 압사된 시신의 사진이 지하철에 걸리곤 했었다. 그때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도 있겠지만 구글을 통해 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.




조종수인 마크 워커 하사와 전차장 페르난도 니노 하사.. 당연히 사형될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'무죄'를 받은 어이없는 사건이 됐다.


더 어이없는 것은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의 골로 16강행이 확정되자 이 사고는 완전히 묻혀버렸다는 것이다. 그렇게 촛불은 거리에서 사라지나 싶었는데..그게 끝이 아니었다.


처음 촛불을 들기 시작한 2002년 이후로 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, 08년 미국 소고기 수입반대, 14년 세월호 참사 추모집회 등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사안이 있을때마다 광장에선 촛불이 켜졌다.


"촛불은 촛불일 뿐이지 결국 바람이 불면 다 꺼지게 되어 있다"

<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말>


결과적으로 불은 꺼지지 않았다. 과거부터 지켜오던 촛불의 힘이 '2016년 박근혜 탄핵'을 만들어 낸 것이다. 많은 사람들한테 잊혀졌던 '여중생 장갑차 사건' 

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처벌해야하지 않을까?